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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이야기/이슈와 이슈

축구 때문에 전쟁을 했던 나라

by 알고싶은 날개 2022. 10. 10.

온두라스 축구

축구 경기로 인해 전쟁을 했던 나라가 있습니다. 100시간 전쟁으로도 불리는 이 전쟁은 바로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이 두 국가 사이의 전쟁이었습니다. 1969년에 진행된 월드컵 예선전이 발화점이 되어 5일 동안 이루어진 전쟁의 경과, 원인, 결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전쟁의 시작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지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지도

지도상으로 보다시피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국경을 맞닿은 나라로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해 있습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이 열리자 지역 예선으로 경기를 치르게 됩니다.

온두라스 국기엘살바도르 국기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국기

1차전 - 온두라스에서 경기. 온두라스 1대 0 승리
2차전 - 엘살바도르에서 경기 엘살바도르 3대 0 승리

당시에는 많은 교통편이 없어 많은 팬들이 원정 경기를 보러 가지 못했던 점이 있지만 홈 어드벤티지를 많이 입은 각 나라가 자국에서 한 번 씩 이기게 되는데요.

1차전, 2차전이 이루어지는 중 원정을 온 대표팀에게 서로 야밤에 깡통을 두드리거나 죽은 쥐를 창문으로 던지는 등 여러 방해 공작이 있었습니다. 경기 중에도 팬들 간의 폭행 및 난투극이 계속 있었고요.

그리고 1차전 이후 엘살바도르의 패배에 충격을 받은 소녀가 권총 자살을 하게 되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가 되었고 양국 언론에서도 서로를 비난하는 보도를 내기 바빴다고 합니다.

엘살바도르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

1대1인 상황에서 어쨋거나 3차전을 해야 결과를 낼 수 있었지만, 3차전을 양 쪽 어느 나라에서 하던지 난장판이 될 것이 뻔했기에, 제3국인 멕시코에서 3차전을 치르게 됩니다.

엘살바도르경찰

멕시코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관중 수보다 많은 경찰을 배치했다고 하는데요.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3대 2로 엘살바도르가 승리를 가져가게 됩니다.

 

그리고 1차전 이후 약 1개월 이후 1969년 7월 13일 엘살바도르는 정말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명분은 온두라스 내 엘살바도르 국민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선전포고를 한 후 7월 14일 새벽 포병부대 사격을 시작으로 1만명 이상의 부대가 온두라스 국경을 넘어가며 전쟁이 시작이 됩니다.

전쟁

전쟁의 원인

축구 경기가 도화선이 되었지만 양 국가 간에는 오랜 기간 여러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엘살바도르 - 온두라스는 과거 스페인의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스페인에서부터 독립을 하면서 국경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영토, 영해 분쟁이 잦았다고 합니다.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보다 4분의 1도 되지 않는 영토를 갖고 있지만 인구는 1.5배 이상 더 많았기 때문에 인구 밀도가 높았습니다.

엘살바도르는 현재도 정부 차원에서 암호화폐을 매입하는 등 국민을 부양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데요. 50년 전인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엘살바도르 국민은 대부분이 농사를 지었는데, 대부분이 가난에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좀 더 넓은 땅이 있는 온두라스로 넘어가 불법으로 농사를 지은 경우가 많이 있었다고 하네요. 30만 명 이상의 인구가 국경을 넘어 농사를 짓는 등의 불법 이민자 문제는 온두라스에게는 큰 골칫거리였고 엘살바도르에서는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는 나라에서 월드컵 예선 1,2차전 이후 양국은 상호간 무역 금지, 출입국 금지 등을 시행하면서 외교관계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고, 무역금지 이틀 뒤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에 있는 자국민을 무차별 폭행했다며 국제 인권위원회에 신고를 하기도 합니다.

 

결국 1969년 6월 23일 단교를 하며 양국의 대사관은 서로의 국가에서 철수하기에 이릅니다.

온두라스 농장

불법이기는 했지만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이 하루 아침에 농작물을 두고 떠나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때문에 온두라스에는 엘살바도르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있었고, 온두라스에서는 엘살바도르인들을 상대로 무차별 폭행이 계속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전쟁의 결과

당시 국력은 온두라스가 엘살바도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국력도 더 강한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온두라스의 기습적인 공격과 함께 전쟁에 대해 전혀 준비를 하고 있지 못했던 온두라스는 전열을 가다듬기에도 바빴습니다.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온두라스의 전력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요. 결국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까지 폭격을 당하게 됩니다.

전쟁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초강대국 미국은 이 사태를 빨리 끝내고자 했는데요.

전쟁의 시작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을 했고 더군다나 냉전 시대였기 때문에 소련, 쿠바만 생각하기만도 바빴던 미국은 우선 경제적 압박을 넣고 미주기구(OAS)를 통해 중재를 하게 됩니다. 결국 엘살바도르는 무조건 철수에 합의하게 되면 공식적인 전쟁은 끝이 나게 됩니다.

전쟁이 시작된지 100시간 만에 전쟁은 끝이 나지만 국경 부근에서의 크고 작은 마찰은 지속됩니다. 전쟁이라기에는 금방 끝이 났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 17,000여 명의 사상자15만 명의 난민이 발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

굳이 전쟁의 승자를 따지자면 큰 피해를 입은 대다수가 온두라스 농민들이었으며, 온두라스는 수도 테구시갈파까지 폭격이 되었지만 반격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전쟁이 끝나게 되었기 때문에 온두라스가 더 손해를 입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후 양국은 1980년 페루 리마에서 평화 협정을 맺으면서 양 국가는 화해를 하게됩니다.

온두라스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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